tvN 토일드라마 ‘화유기’ 제12회는 이승기(손오공 역)와 오연서(진선미 역)가 서로에게 악연일 수 있다는 이야기의 진도를 계속 이어갔다. “이 세상에서 나를 죽일 수 있는 존재는 너밖에 없어. 니가 죽으라고 하면 나는 죽을 거니까.”라는 이승기의 대사가 반복되는 것은 강력한 암시일 수도 있고, 더 강력한 역암시일 수도 있다.
‘화유기’는 암시와 복선을 사용할 때 정직하게 사용하는 적도 있지만, 응용해 비틀고 엮어서 사용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섣불리 예단할 수 없다. 만약 역암시라고 하더라도 한 번의 반전으로 끝내지 않고 몇 번의 엎치락뒤치락을 반복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시청자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 계약에 의한 사랑에서, 죽음을 각오한 사랑까지! 이승기는 결국 사랑꾼이 되는 것일까?
‘화유기’ 초반에 이승기는 금강고의 작동에 의한, 계약에 의한 사랑을 했고, 그 사랑에 대해 거부하는 마음을 드러냄으로써 사랑의 날건달 같은 느낌을 줬다. 이승기는 가짜 사랑, 진실 되지 않은 사랑, 그러면서도 거부하기 힘든 매력을 보여주는 어설픈 난봉꾼 같은 이미지를 구축했었는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진짜 사귀고 싶은 멋진 대상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제11회에 존경과 사랑은 삼장에게만 받으며 된다고 말했던 이승기는, 제12회에서는 죽음을 각오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어떤 누구보다도 매력적인 사랑꾼이 되고 있다. 처음부터 지고지순한 사랑은 아니었기에, 오히려 더 현실적인 인물로 느껴지기도 한다.
사랑의 판타지 중의 하나는 정말 멋진 대상이 “짠”하고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를 만나면서 상대가 변화해 나만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인데, ‘화유기’의 이승기는 두 번째를 택하면서 고정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소급해 전달하고 있다.
◇ 지고지순한 사랑은 원래 차승원과 이홍기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화유기’에서 지고지순한 사랑은 원래 차승원(우마왕 역)과 이홍기(저팔계 역)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차승원은 김지수(나찰녀 역)를 구하기 위해 신선이 되고자 하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몰입하며 절제하고 많은 선행을 쌓으려고 한다.
이홍기는 이세영(좀비 소녀/정세라 역)에게 눈에 보이는 키다리 아저씨 역할을 하는데, 분명 좋은 감정이 있으면서도 이세영이 악귀가 되지 않고 살아 있도록 하는데 에너지를 집중하기 위해 형-동생 관계를 맺으며 헌신적으로 돕는다. 이세영을 위해서라면 이승기에게 맞설 수도 있는 모습을 보이는 이홍기는, 다정다감하면서도 주도적이고 적극적이면서도 지고지순하다.
차승원과 이홍기에 이승기까지 합류함으로써 인간들보다도 더 휴머니즘이 느껴지는 사랑을 ‘화유기’의 요괴들은 보여주고 있는데, 장광(사오정 역)과 이엘(마비서 역), 성혁(동장군, 하선녀 역)의 헌신적인 모습도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판타지를 전달한다.
요괴들이 보여주는 인간미와 휴머니즘은 ‘화유기’에서 중요한 판타지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는데, 드라마 후반부 주요 정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요괴들을 통해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적이라고 생각하는 모습이 실제로는 인간적인 모습이 아닌 이상적인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잠시 하도록 만든다.
◇ 지고지순한 사랑을 흔드는 인물은 이승기였는데, 이제는 윤보라로 바뀌다
지고지순한 사랑은 아름답고 포근하며 훈훈하지만, 큰 임팩트가 없고 반복되면서 지루해질 수도 있다. ‘화유기’ 전반부에서 이런 설정을 뒤흔드는 인물이 이승기였다면, 후반부에서는 윤보라(앨리스 역)이다.
동해 용왕의 아들 옥룡은 원래 바람둥이였다는 설정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옥룡이 자리 잡은 앨리스 역의 윤보라는 거칠고 직접적이며 때로는 가벼워 보이는 사랑의 멘트를 거침없이 던질 수 있다.
앨리스는 여자인데 옥룡은 남자 역할이라는 점도 흥미로운데, 윤보라가 이홍기에게 꽂힌다는 것은 겉모습으로는 여자가 남자에게 꽂히는 것이지만, 남자가 남자에게 꽂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고, 드라마 속 표현처럼 문어가 돼지에게 꽂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윤보라가 이홍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이세영에 대한 이홍기의 지고지순한 사랑에 스크래치를 낼 수도 있다.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버려두고 다른 사람에게 지고지순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 정서적인 일관성을 해칠 수도 있다.
그런데, 외모는 여자이지만 실제 내면은 남자이기 때문에 윤보라의 마음은 다소 코믹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이홍기가 윤보라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이홍기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훼손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화유기’ 제작진의 치밀한 스토리텔링에는 참으로 놀라운 구석이 많다는 것이 느껴진다.
천상욱 기자 (lovelich9@rpm9.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