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정 감독의 ‘악인은 없다’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졸업영화제 상영작인 단편영화이다. 민수(유수빈 분)와 먼저 사귄 소라(이태경 분)와 새로 사귄 지희(주하 분), 그리고 또 다른 친구 은미(김한나 분)가 만나 실랑이를 벌이다가 소라가 넘어져 죽는다.
학교 순찰을 하던 경비원(이장유 분)은 이들의 수상한 낌새를 발견하고 강의실로 들어갔으나 이들에게 포박 당한다. 민수, 지희, 은미는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고 경비원에게 각각의 이야기를 하는데, 같은 이야기를 모두 다르게 말한다.
◇ 같이 있었고 같이 경험했던 사건에 대한 다른 기억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진실을 말하는 것인지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하는 말이 거짓말인지를 인지하는 여부 또한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악인은 없다’는 보여주고 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거짓된 기억이 확신을 가지게 된다면 거짓말은 진실보다 큰 힘을 가질 수도 있다.

또한, 같은 상황에서 같은 경험을 했더라도 실제로 다르게 기억할 수 있다. 그중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기 때문에 다르게 기억될 수도 있지만, 기억 자체부터 다르게 할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같이 회의를 하고도 회의 내용을 다르게 기억하는 경험을 해 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회의록을 작성하고 회의록에 각자 서명을 했다면 의견이 합치된 것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그 회의록에 쓰인 것이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다.
◇ 듣고 싶은 것만 듣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
같은 경험을 다르게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의적으로 거짓 기억을 하지는 않는다고 가정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가 거짓말을 하고 누가 진실을 말하는 것일까? 어쩌면 이 질문은 답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 모두 진실이라고 확신을 가지고 말하기 때문이다. 누구 말이 진실이고 누구 말이 거짓인지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중요한데, 모두가 당사자일 경우 쉽지만은 않은 문제이다.

◇ 심각한 소재, 재미있는 연출,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여운
‘악인은 없다’는 인간의 본성과 죽음에 대한 심각한 이야기를 소재로 삼고 있다. 심각하지만 무겁지만은 않도록 재미있게 연출된 작품이다. 반전의 묘미도 주면서, 영화가 끝난 후 영화 속 메시지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여운을 가지고 있다.
살아남은 역을 소화한 유수빈, 주하, 김한나는, 각자 억울함과 자기 결백을 절박하게 어필하고, 경비원 역의 이장유는 위험함과 심판자의 객관성을 동시에 유지하려는 연기를 효과적으로 소화하기에 영화에 대한 몰입도는 높아진다.
‘악인은 없다’는 영화 속 사건도 중요하지만, 그 사건을 기억하는 과정에서 속마음과 태도 등 내면 심리가 대화를 촘촘히 채우고 있고, 그 대화 속에도 크고 작은 스토리텔링이 들어있다는 점은 영화를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천상욱 기자 (lovelich9@rpm9.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