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선영 감독의 ‘그루잠’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졸업영화제 상영작인 단편영화이다. ‘그루잠’은 타이틀이 올라갈 때 ‘[명사] 깨었다가 다시 든 잠’이라고 영화 제목을 설명해준다.
‘그루잠’에서 잠을 자고 꿈을 꾼다는 것은 실제 잠을 자고 꿈을 꾼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작가가 작품을 구상하고 이야기를 꿈꾼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 작가의 심경을 그대로 담고 있는 영화
걸작은 손에 꼽히고 (거의) 모든 소설은 쓰레기다. ‘그루잠’에 나온 이 말은 작가의 심경일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영화와 연극 등 스토리가 중요한 예술 장르에서 작가와 감독은 다른 사람일 수도 있고, 같은 사람이 맡을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특히 작가인 감독이 많은데, 감독만 할 경우 아직 검증받고 인기를 끌기 전까지는 원하는 시나리오가 들어오지 않는 경우가 많고, 작가의 경우에는 자신의 시나리오가 채택되지 않거나 채택되더라도 자신의 취지와는 다르게 작품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디렉팅을 하겠다고 결심하는 작가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루잠’의 제목과 음악이 주는 나른한 느낌은 창작자의 심경과 상황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창작의 과정, 창출의 과정은 예술적인 영감으로 순식간에 이뤄질 것 같지만 계속 늘어지는 것 같은 시간을 인내하는 과정을 겪어야 하는데, 영화가 주는 나른한 느낌은 이런 창작의 시간들과 오묘하게 닮아있다.
‘그루잠’에 나온 벽면의 소설과 글귀는 마치 범죄극에서 사건과 범인의 행적을 벽에 붙여 놓은 느낌을 주고 있다. 마음속 사건과 인물의 궤적을 시각화하면서, 관객들은 작가의 심경에 점점 다가갈 가능성이 높아진다.

◇ 작가가 창조한 인물과 실제 인물, 내 안의 그녀와 현실의 그녀
제3자가 돼 바라보지만 자신이 창출해내고 자신이 감정이입한 캐릭터는 작가가 창조한 인물이지만, 작가에게는 이미 실제 인물이다. 병욱(장원형 분)과 은수(방은정 분) 또한 그런 시야에서 바라볼 수 있다.
작가의 상상이 과해지면, 작가적 상상의 진도가 과하게 나가게 되면, 내가 만들어냈고 내 제어 하에 있었던 캐릭터들이 나를 벗어나 마치 자체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캐릭터를 겹치지 않게 분리하는 능력이 뛰어난 똑똑한 작가가 자아분열과 혼란의 고통을 겪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미쳐서 이상한 것이 보이는 게 아니라, 이상한 것을 상상하고 만들어내고 보려고 하다가 미칠 수도 있는 존재가 작가라는 것을 ‘그루잠’을 보면서 떠올릴 수 있다.
창작의 고통은 창작의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생길 수도 있지만, 내 안의 또 다른 여러 명의 내가 분화된 것처럼, 내가 만들어낸 겹치지 않는 캐릭터들이 존재감을 가지면서 생기는 혼란과 혼돈의 고통이 다시 나의 내면 깊숙이 들어오기 때문일 수도 있다.

◇ 작가와 작가 지망생들은 무척 공감할 이야기
어쩌면 작가가 자아분열을 경험한다는 것은, 내가 창조한 모든 캐릭터가 겹치지 않으면서도 살아 있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라는 위험한 유혹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결과를 보고 부러워할 뿐 그 과정의 디테일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작가의 고통을 구체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작가들이 결과에 매진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루잠’은 현재 작가이거나 작가 지망생 혹은 창작의 고통을 겪어본 사람들이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깨었다가 다시 든 잠처럼 나른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일반 관객들에게는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루잠’은 관객들의 반응이 어떻게 펼쳐질지 무척 궁금한 작품이다.
천상욱 기자 (lovelich9@rpm9.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