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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ENT 영화] ‘궁극의 초밥’(감독 김종성) 제19회 한예종 졸업영화제(45)

발행일 : 2017-02-14 18:25:47

김종성 감독의 ‘궁극의 초밥’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졸업영화제 상영작인 단편영화이다. 초밥왕 안효석(지성근 분)은 마지막 초밥을 만드는데, 3년 전 떠났던 딸 홍(안서영 분)이 돌아온다.

‘궁극의 초밥’은 집 밖의 세상에서는 인정과 존경을 받는 아버지가 집 안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먹고 싶어 하는 초밥왕 아버지의 초밥을 이제야 처음 먹어본 딸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는 관객들도 있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우리 주변의 모습 중의 하나라는 것에 공감하는 관객들도 많을 것이다.

‘궁극의 초밥’ 스틸사진. 사진=제19회 한예종 졸업영화제 제공 <‘궁극의 초밥’ 스틸사진. 사진=제19회 한예종 졸업영화제 제공>

◇ 초밥을 먹는 순서까지, 서로 자신들의 입장과 관점에서만 생각한다

‘궁극의 초밥’에서 제사 음식이 초밥이라는 것이 눈에 띈다. 제삿날 3년 만에 만난 초밥왕과 딸은 초밥을 먹는 순서를 가지고 갈등을 일으킨다. 광어부터 먹으라고 강요하는 아버지와 그대로 따르지 않는 딸에 대한 반응은 관객의 성향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뭐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닌데 먹는 순서를 가지고 강요하냐고 할 수도 있고, 뭐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닌데 그냥 광어부터 먹으면 되지 왜 거부하면서 갈등을 일으키냐고 말할 수도 있다.

‘궁극의 초밥’ 스틸사진. 사진=제19회 한예종 졸업영화제 제공 <‘궁극의 초밥’ 스틸사진. 사진=제19회 한예종 졸업영화제 제공>

서로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모습은 가족이기 때문에 더욱 민감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 완전 타인이라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것들도, 인간관계의 거리가 가까우면 오히려 그냥 넘어가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다.

왜 다른 사람들에게는 찍소리도 못하면서 나한테만 뭐라고 하냐는 불만을 가족에게 가지게 되는 것도 관계 속에서의 거리감에 좌우되기도 한다. 내 주변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관객이 있을 수도 있는데, 실제로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지만, 자신이 피해자라기보다는 가해자에 가깝기 때문에 심각하게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궁극의 초밥’ 스틸사진. 사진=제19회 한예종 졸업영화제 제공 <‘궁극의 초밥’ 스틸사진. 사진=제19회 한예종 졸업영화제 제공>

◇ 이제야 초밥을 건네는, 아버지의 슬픈 정서

‘궁극의 초밥’에서 초밥왕 아버지는 셋째 딸 홍에게 난생처음으로 초밥을 건넨다. 고지식하고 고리타분하게 보이는 아버지를 집중해서 보면, 아버지는 무척 슬픈 정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족은 부인과 세 딸로 본인이 가족 중에 유일한 남자이다. 막내딸에게 초밥을 처음 건넨 것으로 보아 아버지는 살가운 애정이 없거나 애정표현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인데, 그런 아버지의 행동은 부인과 세 딸을 뭉치게 만들면서 자신은 더욱 외로워질 수 있다.

‘궁극의 초밥’ 스틸사진. 사진=제19회 한예종 졸업영화제 제공 <‘궁극의 초밥’ 스틸사진. 사진=제19회 한예종 졸업영화제 제공>

초밥왕 아버지는 고집과 아집으로 결국 외롭게 혼자 살고 있다. 제사상에도 초밥만 올릴 정도로 자신이 확고한 진리하고 믿는 캐릭터인데, 그 고집과 아집이 집 밖에서는 전문성으로 인정받기 때문에 가족 안으로 들어올 경우 더욱 쓸쓸하게 느껴질 수 있다.

현재는 무척 친근하고 애정표현도 서슴지 않는 아버지들도 세상에 많아졌지만, 아직도 많은 아버지들은 ‘궁극의 초밥’의 초밥왕 아버지와 같다고 볼 수 있다. ‘궁극의 초밥’에서도 느낄 수 있는데, 이런 경우 아버지를 피해자로만 볼 수는 없다. 더 많은 상처를 가족들이 받고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궁극의 초밥’ 스틸사진. 사진=제19회 한예종 졸업영화제 제공 <‘궁극의 초밥’ 스틸사진. 사진=제19회 한예종 졸업영화제 제공>

◇ 어두운 듯 어둡지 않은 조명

‘궁극의 초밥’은 어두운 듯 어둡지 않은 조명이 눈에 띈다. 영상은 마치 유화로 그림을 그린 것 같은 정적인 분위기를 보여주는데, 정적인 고착감을 깨는 것은 움직임도 감정의 질주도 아닌 빗소리라는 점이 주목된다.

만약 ‘궁극의 초밥’ 초반에 빗소리가 없었으면 관객들은 어떻게 영화를 느꼈을까? 빗소리가 없기에 대사가 더욱 또렷하게 들렸을 수도 있고, 답답한 마음에 갇혔을 수도 있다. 빗소리는 상황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게 만들었고, 다른 방향의 감정이입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감독이 의도적으로 설정한 것인지, 감각적으로 구현된 것인지 궁금해진다.

천상욱 기자 (lovelich9@rpm9.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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